[NBC-1TV 김은혜 기자]제2대 국회는 6·25 한국전쟁의 비극과 함께 시작된 국회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국회 총선이 실시되고, 총선 20일 만인 6월 19일, 원(院)구성을 위한 첫 집회에서 국회의장에 신익희 의원, 부의장에 장택상·조봉암 의원을 선출한다.
그러나 원구성 6일 만에 6·25 한국전쟁에 휩싸이게 되고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될 때까지 의원들은 대전, 대구, 부산 등지의 임시의사당에서 전시에 필요한 입법활동과 민심수습을 위해 사선을 넘나드는 의정활동을 하게 된다. 국회의사당 변천사에서 대구 문화극장, 부산 문화극장, 부산극장, 경남도청 무덕전 등은 전란에 휩싸인 제2대 국회가 급박한 피난길에서 사용했던 임시의사당들이다.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 다음날인 6월 26일 새벽, 비상연락을 받고 국회로 달려온 의원들은 긴급회의를 열어 대통령을 비롯한 전(全)국무위원을 출석시킨 가운데 사태 수습을 논의했으나, 사태파악조차 하지 못한 채 산회하게 된다.
6월 27일 다시 회의를 열어 국방부 장관과 참모총장을 출석시킨 가운데 사태의 진상을 보고받고 대책을 추궁했으나 명확한 답변을 듣지 못한다. 다급해진 국회는 원세훈 의원의 긴급동의로 ‘미국대통령및국회에대하여긴급원조를요청하는메시지발송과수도사수에관한결의안및사태수습긴급조치에관한건의안’을 만장일치로 의결한 후 수원으로 피난길에 오른다.
피난국회에서 의원들의 활동은 전황 보고와 치안유지, 민심수습과 전쟁복구 등을 위한 입법과 예산조치 등이 주를 이루었다. 국회가 개회 중임에도 피난민의 구호와 위문 등으로 일선을 넘나들어야 했다.
피난 초기 신익희 의장은 대전시장 관사에 머물면서 가끔 대전방송국에 들러 “우리는 수도를 잃고 대전까지 피난 와 있는 형편이지만, 옳고 착하고 어진 마음씨의 사람은 외롭지 않고 이웃이 있는 법이니 반드시 같은 종류의 친구가 있어서 우리를 도와 이 싸움은 꼭 이길 것이다. 우리 친애하는 동포 동지들은 마음 차분하게 먹고 각자의 생업에 충실하라”는 내용으로 선무방송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전시국회의 이면을 보여주는 두 가지 자료가 있다. 총기휴대 허가증과 군복착용 허가증이다. 총기휴대증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단기 4284년) 이상돈(제헌·5·6대) 전 의원에게 내무부 장관이 발급한 것으로 돼 있다. 총기류는 영국제 32구경 권총이며 증서의 앞면에는 ‘타인에게 대여하거나 양도할 수 없다’고 명시돼 있어 총기 휴대는 당시 전·현직 국회의원들이 갖는 하나의 ‘특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군복착용 허가증은 헌병사령관이 발행한 것으로 전시 중 군복을 입을 수 있도록 허가한다고 되어 있다. 일부의원들은 군복차림에 권총을 차고 다녔으며 이 같은 차림으로 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