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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세무사 문도영 형제가 만든 문씨 가족사박물관 삼형제의 집

부모님 사후에 삼형제가 고향집을 보전해 만든 '추억과 감동의 공간'


[NBC-1TV 이석아 기자]나만 잘살면 된다는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팽배한 사회, 돈 앞에서는 부모형제도 필요 없다는 상식 이하의 가치관이 난무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가족단위의 효도학습을 만끽할 수 있는 감동적인 명소가 있다.

동해의 푸른 바다와 은빛 백사장이 펼쳐진 경북 울진군 기성면 구산리에 소재한 '문씨 가족사박물관 삼형제의 집(이하 삼형제의 집)'이 그 곳이다.

'삼형제의 집'은 부모님 사후에 형제들이 고향집을 공동 소유로 합의 한 후 부모님의 유품과 형제들의 걸어온 길을 잘 정리하여 꾸며진 효도와 형제애의 결정체 이다. 거두절미하고 삼형제 중 둘째인 세무사 문도영의 글을 직접 옮겨 본다.


나의 살던 고향은 세무사 문도영의 울진 기성면 구산리/울창한 솔밭 끝나면 탁트인 바다와 항구…이런 곳이 또 있으랴 ... 백암산에서 발원한 남대천이 동해로 흘러 내려와 닿은 곳에서 십여 리 펼쳐진 은빛 백사장과 월송정을 에워싼 곰솔(海松)이 울창한 솔밭 끝자락이 나의 고향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구산(구미)리이다.

구산은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조그만 어촌마을인데 최근에 방파제 증축 및 확장공사를 하여 제법 그럴듯한 항구 모습을 갖추었다.

봄이면 울긋불긋 진달래 손짓에 동네 길을 마다하고 학교 뒷산을 가로질러 동무들과 참꽃(진달래꽃), 찔레순을 따 먹고 밀 서리를 하다가 늦게 하교하여 어머니로부터 꾸중 듣던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여름이 오면 하루 종일 바다에 나가 물장구를 치고 놀았다. 지금은 항구 공사로 없어졌지만 큰 바위, 작은 바위, 고래치바위를 헤엄쳐 나가서 성게, 전복, 해삼, 고동(골뱅이)도 채취하여 먹다 보면 하루 해가 짧았다.

가을이 오면 장시골 밭 고구마 캐기, 논 벼베기, 큰창골 콩 수확을 하느라 방과후 및 농번기 가정실습(일손돕기)은 하루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다 가곤 하였다. 겨울이 오면 땔감이 모자라 겨울방학 때 아버지와 함께 십여 리 길을 가서 아카시아 나무를 베어 지게에 지고, 리어카에 싣고 집으로 향하는 날이 많았다.

명절이 다가오면 동네 콩쿠르가 동회관에서 개최되었다. 어릴 때 그냥 오래된 동회관으로만 알았으나 우리가 뛰어놀던 곳이 아주 중요한 문화재인 대풍헌(待風軒)이었다. 대풍헌은 조선 후기 울릉도를 가던 수토사(搜討使)들이 배를 짓고 물자를 준비하여 순풍(順風)을 기다리며 머물렀던 장소이다.

이곳에는 울릉도와 독도를 관리했던 수토절목(搜討節目)과 완문(完文) 등의 귀중한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11호가 보관되어 있어 독도 영유권 분쟁의 증거자료로 상당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우리 동네는 예로부터 해산물이 풍부하였다. 동네에서 멀지 않은 왕돌초(일명 왕돌짬)에서 생산되었던 주먹만 한 큰 자연산 멍게(울멍지)는 꿀맛이었다. 입에 넣을 때 그 향기는 정말 잊을 수 없는 고향의 맛이다. 그때 그 멍게는 사라지고 울진대게와 문어가 식도락가의 입맛을 이어가고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오 리 정도 되는 평해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평해 중학교는 우리 구산초등학교, 월송초등학교, 평해초등학교 등 3개 초등학생이 모인 학교였다. 코스모스가 손짓하는 해수욕장 솔밭 길을 지나 군무봉 다리를 건너 월송정 솔숲을 가로질러 가는 등굣길은 환상의 올레길이다.

천혜의 울창한 해송이 사방으로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는 안에는 가물치와 청설모가 노니는 녹화정 교재원과 함께 자리한 평해중`고등학교. 이곳은 대한민국에서, 아니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학교라고 생각한다.

대구에서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초임 발령으로 부임한 선생님들께서 아름다운 경치에 놀라 감탄사를 연발하시던 기억이 새롭다. 같은 초`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한 초`중`고 동기인 친구들이 30여 명이나 되니 동기들의 형제, 아버지 존함, 집안 사정을 소상히 알고 있다.

고향을 떠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회를 별도로 하지만 만나는 사람의 절반이 계속 만나는 그 친구가 그 친구이다. 나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울진세무서로 발령받아 국세공무원의 길을 고향에서, 부모님 곁에서 걷게 되었다.

아내와 인연도 고향에서 출발하였다. 세무서에 출근하여 주류도매상 조사차 출장 간 곳이 후포이고 피조사 업체의 경리로 만난 것이 우리 인연의 시작이었다.

월송정 솔밭길과 월송정 호숫가를 데이트 삼아 지나노라면 철썩이는 파도와 밤하늘의 영롱한 별빛의 시기를 따갑게 받곤 하였다. 친구들과 곰솔의 축복을 받으면서 웨딩마치에 맞추어 행진한 곳도 솔밭 신혼예식장이다. 이제 이십 대 중반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으니 세월이 많이 흘렀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우리 집의 가업이 있었다. 철원에서 울진으로 이사 올 때에 어머니께서 무거운 맷돌을 가지고 오셨던 것이다. 초등학교 이 학년 때부터 연중 내내 두부를 만들어 판매하는 것이 생계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콩 한 되를 맷돌에 가는 데 한 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명절에는 하루에 열두 되의 콩을 갈아야 하니 엉덩이가 짓무를 정도였다. 부모님과 형, 나는 일 년 내내 맷돌과 씨름하였다. 명절을 맞으면 며칠 동안은 거의 밤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두부를 만드는 데 골몰하였다.

어머니는 고향집 안방에서 십 년 전 편안히 유명을 달리하셨다. 아버지는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눈감으면 떠오르는 고향의 강” 노래를 목 놓아 부르시다 고향산천을 다시 밟지 못하시고 작년에 세상을 등지셨다.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고향집을 최대한 보전하는 방법으로 깨끗하게 수리를 하였다.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을 위주로 벽지를 만들어 도배하였는데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이 많지 않아 아쉬움으로 남는다.

부모님의 유품을 보존하고 우리 형제들의 걸어온 길을 잘 정리하여 문씨 가족사박물관 삼형제의 집이라고 명패도 달았다. 아버지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도영아, 너는 영국신사다”라고 하시던 말씀이 기억에 선하다.

아버지가 지어주신 영국신사 별명은 어떤 상속재산보다 가치가 있다. 항상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을 되뇌면서 영국신사가 되도록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 고향집을 새롭게 단장하고 형, 나와 동생의 지인들이 한 달에 두세 번 번갈아가면서 방문하여 쉬어가고 있다.

지인들이 지위가 높은 분들의 생가만 있는 것이 아니고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생가도 있구나 하면서 부러워한다. “곰솔아, 갈매기야, 고향바다 동해물아, 영원하라!”

글의 주인공인 세무사 문도영 씨는 위로 형 문도진(향토예비군 시흥시지역 대장)씨와 아래로 동생 문도인(변호사)씨가 있다(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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