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31 (일)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교육

'책'보다 값진 교훈을 주신 시각장애인 법학박사 길인배

어진 아내가 그의 눈이 되었다


잠결속에서 바람과 함께 들려오는 그 어떤 소리가 나의 귓볼을 스쳤다. 어디에서 들리는지 어떤 소리인지 도무지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깜짝 놀랐다.

얼떨결에 벌떡 일어나서 두 팔을 허공으로 휘저었다. 동그랗게 만져진 유리알을 돌려서 불을 켰다. 저쪽 좁은 마루 끝에 남편이 앉아 있었다. 열심히 무엇인가 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희미한 불빛속에 뾰족 뾰족 돋아있는 하얀 성들의 모임이 있었다. 일어나 천정에 달려 있는 백혈전등마저 켰다.

맹인인 남편은 앉은책상 위에 놓여진 그것을 양손으로 읽어 나갔다. 하얀얼굴, 굳게 다문 붉은 입술, 하얀 '점자의 성'들...

그 모든 것들이 사랑스러웠다. 그것은 신선하고 깨끗했다. 그리고 신비로웠다. 저이는 분명, 하늘의 사명을 타고 난 인물이다.

나의 모든 것을 바쳐 남편을 사랑해야겠다[김용남 詩]



[NBC-1TV 이광윤 보도국장]지난 달 2일 기자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춘천 MBC에서 보도국장만 14년을 지낸 지규헌 선배였다. 통화를 끝낸 직후, 춘천으로 향한 기자는 도착 즉시, 대선배의 과거사를 들으며 어디론가 향했다.

"길박사, 나 지규헌이요, TV 보고 계시다고요. 지금 후배와 그 곳으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5분이 지났을까? 차가 어느 침시술원에서 멈춰섰다. 그리고 선배의 뒤를 따라 그 곳에 들어갔다.

"인사하지, 길인배 법학박사야."
"아니 아까 선배와 전화통화 하신 길박사님이십니까?"
"예, 방금 TV를 끄고 나오는 중입니다"

흔히 안부 전화를 할 때면, TV를 본다며 농담을 한다는 길인배(56) 박사는 6살때부터 영양실조로 인해 시력을 잃은 시각장애자였다.

더욱 기자를 놀라게 한 것은 그의 서재에 걸린 법학박사 학위증이었다. 사회복지 분야에서 그것도 열명 안팎의 박사만 있다는 시각장애인 박사인데, 일반 수재들도 취득하기 어려운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 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웠다.

지난 7월25일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으로 선정되어 청와대에 다녀오기도 한 길인배 박사는 천성이 맑아 모든 일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라는 칭송을 듣고 있었다.

그런 그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어머니와 아내 김용남(49) 여사이고, 또 두 여인이 오늘의 길인배 박사를 성공시킨 주인공이라고 한다.



그의 눈이 되어준 아내

아내 김용남 여사는 23세 때인 지난 1975년 계성학교 교사시절에 30세인 총각 길인배를 만났다. 그리고 그해 곧바로 자신이 더 적극적으로 구애를 하여 결혼했다고 한다.

당시 길인배는 23세 때인 1968년 춘천대 법대를 수석입학하는 기염을 토했고, 후에 춘천대가 강원대로 흡수된 후에도 놀라운 학업성적으로 강원대 법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는 금자탑을 세우기도 했다.

점자로 된 전문서적이 부족해 전 학과 교과서는 전부 점자노트로 바꾸어야하는 번거러움도 있었고, 시험은 교수가 문제를 부르면 점자로 기록하여 해답을 점자로 써서 제출한 후, 과목 주임교수 앞에서 점자 해답을 읽으면 다시 문자화하여 접수를 했는데, 이렇게 제출한 답안지가 전부 80점 이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길인배의 대학과정은 일반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생과 고비가 있었다. 학교를 통학할 때 동행해줄 이가 없서 혼자 통학을 했는데, 비오는 날 하수구에 빠져서 여러 시간을 물속에 갇혀 있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죽고 싶도록 서러웠다"고 한다.

그런 길인배가 아내 김용남을 만나면서부터 새로운 삶의 전기를 마련한 것이다.

아내가 전국의 서점을 뒤져 구해온 전문서적을 읽어주고, 필요한 것을 점자로 타자를 쳐주면 길인배는 밤을 새워가며 손끝이 닳도록 책장을 넘겼던 것이다.

서두에 올려진 글은 이 시기에 아내 김용남 여사가 밤샘 공부를 하는 것을 보고 즉석에서 적어둔 글이다.



침시술원 개원, 현실의 '허준'이라 불리다

4천원짜리 삭월세방에서 시작한 신혼생활은 고생 보따리였다.

그러나 아내 김용남은 늘 남편을 위했다. 당장 끼니가 없는데도, 남편의 학업을 독려하고 부족한 점자책을 찾기 위해 전국을 누볐다.

그 시절 언젠가 끼니 걱정을 하고 있을 때, 방송국에서 취재를 나온 기자가 이들 부부의 어려운 형편을 알고는 고기를 사주었는데, 그때 배부르게 먹은 고기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아내 김용남 씨가 갑자기 남편 길인배에게 다가가 말문을 열었다. 맹아학교시절에 배운 길인배의 침술도 법학공부만큼 모범적이었으니, 침시술원을 개원 해보자는 제안이었다. 틈만 나면 책만 잡던 남편이었기에 무척 조심스러웠던 제안이었는데, 의외로 남편 길인배는 쉽게 동의했다.

길인배 씨는 "내 자신이 장애자인데, 또 다른 장애인을 돕는다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라며 춘천시 효자1동에 당장 '길인배 침시술원'을 개원했다.

때는 1977년 길인배의 나이 32세, 아내 김용남 씨가 25세 때였다.

끼니를 염려할 만큼 어려웠던 시기였기에 개원 당시의 형편은 초라하기 한이 없었다. 어진 아내 때문이었을까? 하늘이 이들 부부를 곧 바로 도와주었다.

불치의 척추 디스크 환자와 위궤양 환자들을 1-2달 사이에 완쾌시키면서 길인배침시술원은 단번에 유명해졌다. 한방에는 문진, 맥진, 시진, 촉진이 있는데 이중 침시술은 촉진에 해당하는 시술로서 맹인들에게 적당하다고 한다.



이미 16세기에 개발된 침대롱도 맹인이 고안한 의구인데도 지금 일반 침술사들이 사용할 만큼 맹인들의 예민한 감각이 발휘되는 곳이 침술이라고 한다. 그의 침술에 완쾌된 환자들이 그를 현실 속의 '허준'이라며 입에서 입으로 칭송하면서 환자가 연중무휴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던 1988년 후반, 길인배는 아내로부터 또 다른 제의를 받았다. 하던 공부를 계속하지 않겠냐는 권유였다. 길인배는 침시술원과 대학원 수업을 병행하면서 결국 1988년 2월, '심신장애자 복지제도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8년 후인 지난 1996년 2월 모교 강원대로부터 '장애인 고용제도에 관한 연구'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언필칭 국내 시각장애자로서는 첫 법학박사가 되었던 것이다.

취재를 마치고 나올 무렵, 길인배 박사는 클라리넷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찬송가를 연주했다. 자신의 두 눈이 되어 준 아내에 대한 보답의 연주라고 했다.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