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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파월 종군기자 지규헌의 투혼(1)

40년전 종군 취재했던 지규헌 기자의 지난날 조명..


지난 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의 기습적인 포클랜드 제도 공격으로 시작된 포클랜드 전쟁(Falkland Islands War)은 6월 14일 아르헨티나 수비대의 항복으로 종결되기까지 950명(아르헨티나군 700명, 영국군 250명)의 사망자를 냈다.

당시, 영국군과 아르헨티나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을 때, 영국 내부에서는 대처 수상과 BBC 간의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르헨티나군이 포클랜드 제도와 주변 속령들의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기습적인 전쟁을 감행하고, 이에 영국이 즉각적인 보복응징에 나서며 전쟁이 본격화됐을 때, 영국의 BBC는 자국의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철처한 중립 보도로 일관했다.

이에 대처 총리는 "BBC가 어느 나라 방송인가"를 강조하며 아쉬움을 토로했고, 결국 "전쟁에 아들을 내보낸 영국 어머니들의 눈물을 보라"고 하소연했다. 이에 대해 BBC는 "지금 아르헨티나의 어머니들도 울고 있다"는 논평을 내며 언론의 객관성을 유지하여 세계언론계에 화제가 되었다.

단기전으로 끝난 '포클랜드 전쟁'과는 달리 개전 시점부터가 애매한 '월남전'은 종군기자들의 애환이 서린 비극의 현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파가 사망한 이듬해인 1955년부터 미국이 '고딘'정권에 군사원조를 시작한 시점을 개전으로 본다면, 베트남 함락까지 20년간의 장기전이 지속되었던 월남전은 사망한 월남인의 수만도 120만-160만명으로 추산된다. 비전투원이 48만명(월남측 약 41만5천명, 월맹측 약 6만 5천명)이고, 전투원의 경우 월남군 약 22만명, 해방전선과 월맹군 66만6천명, 미군 약 4만5천명, 한국군 및 제3국군 약 5천명이다.



이 가운데, 종군기자들의 순직도 상당수 된다고 한다. 미국 언론사 소속의 전사 기자만도 50여 명이라고 한다(최첨단 보도장비가 동원되는 오늘날에도 전장의 취재는 늘 위험에 노출돼 있다. 이번 아프간전쟁에서도 다수의 종군기자가 희생된 것이 이를 반증하는 것이다). 보도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종군기자들의 근성은 자연히 특종으로 귀결된다.

미군 폭격기가 발사한 '네이팜탄'에 의해 불붙은 옷을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뛰어가는 9세 소녀의 사진을 찍어 '퓰리쳐상'을 받은 미국의 AP 통신 '닉우트' 기자의 활약은 종군기자들의 투혼을 보여준 리얼니즘의 한 단면이다.

그 월남전에 특파된 한국 종군기자들의 활약은 전투병만큼이나 용감 했다. 유엔군 통제하에 있었던 당시의 한국 종군기자들은 전투병과 똑 같이 완전무장을 해야만 했고, 그날 그날의 보도 자체가 '유서'였을 만큼 위험했다고 한다.

당시 종군기자로 활약했던 K.F.V.N(주월한국군방송)의 지규헌(현, 디지원 캐스트 인터넷방송 상무) 기자는 최근의 아프간 상황을 남달리 지켜본, 전직 종군기자 중의 한 사람이다. "지금이라도 여건만 주어 진다면 언제든지 아프간 종군기자로 나서겠다"는 이순의 노기자이다.

40년 전, 그는 전투가 가장 치열하다는 청룡부대를 택해 월남 북부 쾅남성에 있는 '추라이(청룡 다낭방송)'로 특파 되었다. "모든 종군취재가 목숨을 담보해야 하지만, 상습적인 게릴라전 형태로 전개되는 월남전의 경우 늘 지옥(?)의 기로에 설 수밖에 없었다"는 게 그의 '회고담'이다.

실제로 그는 세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베트콩과의 인터뷰를 시도키 위해 스스로 우겨서 적진에 헬기로 투하되었을 때가 그 첫 위기였다.

너무 무모한 시도여서 지규헌 기자를 엄호하던 많은 병사들이 몰살 될 뻔했다. 다행히도 엄호에 지원됐던 청룡부대 제2해병여단 공정식 대위의 뛰어난 작전술로 위기를 모면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죽음의 위험은 계속 되었다. 용두2호 작전시, 전선취재를 위해 1개 중대와 함께 베트콩 출몰지역에 투입, 지척을 분간키 어려운 정글에서 중대장을 엄호해 포복하던 통신병이 한 순간에 부비츄렙에 걸려 큰 굉음과 함께 그 자리에서 폭사를 한 것이다. 생사의 기로에 선 순간 그는 그 짧은 순간에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했다고 한다.

7남매 중 5번째로 장남이었던 그는 "군인으로 참전하는 것도 아니고, 제대한 후에 굳이 민간인 신분으로 전장으로 갈 필요가 있겠느냐"는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종군기자로 떠나온 것이 아닌가. 결국 그 충격으로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져 결국, 중풍으로 앓아 누우셨으니, 자식으로서의 갈등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쩌면, "어머니보다 먼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가장 괴로웠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그의 본능적인 기자정신은 스스로 격전지만을 자원케했다. 하루는 퀴논시내 라이따이한 취재를 마치고 방송국으로 돌아오던 중 저격수가 쏜 총탄에 짚차의 허리 부분이 맞아 달리던 차가 화염에 휩싸여 4명이 화장될 뻔한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월남전의 아픔을 사진으로 보여준 AP통신의 닉우트 기자와 지규헌 기자는 왜, 목숨을 걸고 취재를 할 수 있었는가? 그런 기자정신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리고, "자국의 전쟁인데도 중립적으로 보도했던 BBC의 보도성향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곰곰히 되새겨봐야 할 때다.

미국의 아프간에 대한 보복 공격은 종전될 조짐을 보이지만, 전쟁은 어떤 형태로든지 재발될 조짐이 보인다. 평화를 위해서 전쟁을 불사한다는 강대국(?)의 오만과 독선을 어찌할 것인가, 그것을 총으로 응징하는 것이 전쟁론이고, 그것을 기사로 대응하는 것이 언론(?)이다.


종군기자 지규헌(60)는 폭탄의 불바다에서의 22개월만인 지난 1969년 9월 월남전 종군을 마치고 귀국한 후, 그해 11월 영남TV(대구MBC전신)공채1기로 대구 MBC에 입사 했다. 그리고 투병중인 어머니의 간병을 위해 1970년 3월 1일부터 춘천 MBC로 전근한 이래, 보도국장, 편성국장, 기획심의실장, 방송제작국장, 상무이사 등을 역임 한 후, 현재 디지원 캐스트 인터넷방송 상무로 재직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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